우고 론디노네의 개인전 보도자료는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로 우리를 도발한다.
나는 본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고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물리적인 현상인지
혹은 형이상학적인 현상인지에 대한
조각을 만든다.
전시회의 제목은 《nuns and monks by the sea》이다. 서울과 부산에서 동시에 열리는데 내가 본 것은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의 전시다. 서울은 작가의 세 번째 전시라고 한다. 국제 갤러리를 자주 들르지만 최근 기억에는 없다.
K3 전시장에 들어서면서 이게 뭐지 하며 느끼는 것은 색색의 달마도다. 그리고 전시 제목을 살펴보고는 고개가 끄떡여진다. 전시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다양한 시각에서 작품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다. 그래야만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사람들이 조각을 배경으로 연신 핸드폰을 눌러댄다.
작품 설명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관람자는 론디노네의 작품 사이를 걸어 다니면서 물리적, 형이상학적으로 움직이고, 보는 것만큼이나 귀를 기울이며, 머리로 이해하는 것 못지않게 마음으로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으니 전시장은 바로 그대로 인 것이 아닌가.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저 이심전심의 마음으로 전하는 법을 작가는 알고 있는 듯하다.
우고 론디노네의 커다란 청동 조각 연작 〈nuns + monks〉 5점을 내세워 전시공간을 가득채운다. 짙은 회색의 전시 벽면에는 붓자국과 같은 흔적들이 보인다. 전시장 벽면을 짙은 시멘트 벽면의 약간의 엣지를 더하여 원색의 작품들을 더욱 도드라지게 하고 있는 것이다
도를 닦는 사람의 신비로움이 다섯 점의 〈nuns + monks〉 조각들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넘친다. 그리고 관람자들과 어울려 공간이 되고 시간이 되고 정신적 에너지가 솟구친다.
하나의 거대한 원색의 돌 위에 다른 색상의 작은 머리가 사람의 형상임을 쉽게 알게 한다. 더욱이 대담하게 면들을 쑥쑥 잘라낸 모습에서 다리와 몸통과 그리고 날리는 옷자락을 보게 된다. 어디론가 향해 가고 있는 듯한 모습 속에서 자코메티 조각에서 느껴지는 원시적 본능을 발견하게 된다.
조각들은 크지만 우리를 압도하지 않는다. 어찌보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형상 각각은 나름의 의연한 도를 말하고 있다. 각각의 개성이 자연스럽게 발산되며 전시 공간은 도량이 되고 조각들이 무언으로 전하는 법음을 들을 수 있다. 우리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잠시 세상에 찌든 자신의 마음을 치유하며 안도할 수 있다.
본래 작은 크기의 석회암 모형으로 제작되었던 작품을 작가가 스캔하고 확대하여 청동 주물로 다시 만들었다고 하는데 돌의 질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작품 설명에 따르면 ‘무아의 황홀경을 선사하는 이 조각들은 바로크 미술가들이 작품에 담곤 했던 바람(wind)으로 고요히 마음을 움직인다.“고 하는데 과연 그러하다.
전시공간의 벽면과 바닥도 다 작가의 작품의 하나라고 하니 우리는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작품의 의미를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공간과 시간을 전하는 작품은 그 자체로 단순하고도 대담한 도인 것이다
작품 설명을 다시 한번 읽어보며 우리는 또 다시 깨닫는다.
관람일 2022년 4월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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