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움미술관 2023년 첫 전시로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WE>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카텔란의 미술계 등단 시기인 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대표적 작품 38점으로 구성되었다. 전시 기간은 2023.01.31.-2023.07.16.이다.
주차장 벽면 포스터에서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벽면을 뚫고 우리들을 내다보는 곳에서부터 시작된다. Maurizio Cattelan 그리고 WE 2023.1.31.-7.16. 군더더기 없이 명료하고 깔끔하다. 항상 궁금한 것은 전시 포스터도 작가의 작품인지 하는 것이다.
미술관 입구에 한 노숙자가 짐보따리를 베게 삼아 누워있다. 그가 동훈인지 준호인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사전에 미리 들었거나 미술관 로비에서 설명을 보지 않았다면 이것이 전시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기는 쉽지 않다. 미술관 로비에도 관람객과 뒤섞여 노숙자 한 명이 기둥에 기대어 쭈그리고 앉아 있다. 왠지 친숙하게 느껴지는 작품으로 어디선가 본 듯도 하지만 기억은 나지 않는다. 생각보다 관객들이 붐빈다. 기둥에는 코르크 마개로 입을 막고 있는 남자의 사진이 분절되어 붙어 있다. 데스크 위에도 눈치채지 못하게 박제된 비둘기들이 열을 지어 앉아 있다.
한쪽 벽면을 장식한 코오롱과 NC소프트의 광고 포스터도 ‘일하는 것은 나쁜 일이다(Working is a bad job)’라는 작품의 시리즈이다. 전시는 시작부터 우리를 도전적으로 희롱한다
전시장 한 가운데 바닥을 뚫고 작가 형상의 조각이 관객들을 훔쳐본다. 우리는 그런 조각을 바라보며 작가의 생각에 놀란다. Z자 형태로 찢어낸 검은 캔버스가 X를 넘어 담백하게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옆에 작가 두상 형상의 조각이 많은 것에 대답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카텔란의 동화와 같은 세계에는 작은 장남감 엘레베이터가 앙증스럽게 작동하고 양철북을 연상시키는 소년이 북을 친다. 일정한 시간 간격을 두고 북소리가 들린다. 녹음된 소리가 아니라 소년 설치물이 북을 두드린다.
이탈리아 지도가 작가의 국적을 드러내고 시야를 압도하는 아버지의 커다랗고 고단한 발바닥이 어린 날의 기억을 불러낸다. 벽을 마주한 검은 고양이가 양자역학의 우울한 절망을 이야기하는 듯이 보인다. <우리>라는 제목의 침대에 누운 작가 형상의 설치물이 무언가를 상징하며 질문을 던진다. 르네 마그리트의 붉은 모델을 연상시키는 부츠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허공에 매어달린 축 늘어진 말의 형상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내던져진 Novecento(20세기)의 좌절된 꿈을 보게 된다. 또한 한쪽 벽 옷걸이에 걸려있는 자화상 조각이 허공을 응시하며 관람객들을 노려보고 있다.
작가는 호기심으로 우리를 이끌고 반전의 메시지를 던진다. 살짝 열린 냉장고는 다가가 속을 보면 중년의 여성이 앉아 있다. 교복을 입고 간절히 기도하는 어린 학생의 등을 따라 가까이 다가서 앞을 보면 ‘그’가 있다. 히틀러가 참회를 한다.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의 눈은 의외로 간절하기만 한데.... 작은 학교 책상과 의자에 앉아 공부에 열중하는 찰리의 뒷모습에 다가서면 그의 표정은 무표정하고 두 손은 연필로 십자가의 형벌을 받고 있다. ‘비디비도비디부’의 작은 동화 속 세계도 다가서 보면 식탁 아래로 권총이 떨어져 있고 다람쥐는 스스로 자살을 한 듯. 작가의 재기가 넘쳐 이제 불행에도 끔찍함에도 우리는 무감각해 지고 있다.
2층에 들어서면 자연사 박물관의 뼈 전시물과 같은 ‘브레맨 음악대’의 절규가 ‘비밀’이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반대편 끝에 가면 박제된 작품을 만날 수 있는데 당나귀와 개와 고양이와 까마귀의 절규가 박제되어 화석화 되어 들리지 않는다.
탄흔으로 장식한 성조기, 거꾸로 선 뉴욕경찰 설치물들이 9.11 테러의 슬픔을 소환하고 미국 워싱턴 베트남 참전 용사 기념비를 패러디한 화강암 기념비를 디자인한 ‘마야 린’의 감성으로 슬픔을 어루만진다. 이미 만들어진 ‘아이 러브 뉴욕’을 발굴하여 그림의 여백에 새겨진 수많은 사연에 우리 시선을 끌어들인다.
너무도 편안하게 숨을 거둔 여성과 그 앞에 얌전히 자리잡은 개의 조각을 통해 죽음의 두려움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반면 갤러리스트를 회색의 테이프로 숨쉬지 못하도록 포박함으로써 우리 삶을 희화화한다. ‘코미디언’이라는 제목 아래 바나나 하나를 테이프에 고정시키고 얻은 고액의 평판을 먹어치우는 퍼모먼스(1층 로비 기둥의 작품)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미술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이때 1층 양철북 소년의 북소리가 울리고 2층 난간을 통해 바라보는 그 모습은 또 다른 미술의 경험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어디까지가 작가의 의도인 것일까?
전시장 바닥 가득 늘어선 아홉구의 시신 조각은 ‘모두’이다.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익명의 죽음이 화폭을 가득 메우듯 전시장을 압도한다. 머리가 아닌 몸을 박제한 말의 형상이 상식을 뒤집은 채 벽에 걸려 무엇인가 말을 하려한다. ‘사랑이 두렵지 않다’의 아기코끼리는 백인우월주의 결사단체 KKK의 두건을 둘러쓰고 하얗게 드러낸 발톱으로 무언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한다. 판자로 결박되어 문짝에 매어달린 한 여성의 조각이 사실처럼 우리에게 다가선다.
한쪽을 바라보니 합판으로 지어진 커다란 가건물을 둘러 관람객이 줄을 서 있다. 그 궁금증의 끝에는 너무도 앙증스러운 시스티나 성당이 있다. 직접 방문하여도 수많은 관람객으로 볼 수 없었던 성당의 벽화를 상세히 볼 수 있다. 더욱이 보려고 상상도 못했던 성당 바닥의 문양을 처음으로 보게 된다.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성당 앞에는 교황이 운석을 맞아 쓰러져 있었다.
이 모든 전시의 끝을 장식하는 것은 찰리의 세발자전거였다. 세발 자전거를 타고 나타난 찰리는 전시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관람객들과도 눈을 맞춘다. 무엇을 보았나요 무엇을 느꼈나요 아이는 장난스럽게 질문을 하고 있었다. 그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쉬러 갈 때까지.
전시와 작품은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한계로 모호할 수 밖에 없는 작가의 생각과 경험 그리고 감정을 체험을 통해 뇌에서 뇌로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소산이 아닐는지. ‘어머니’의 사막을 뚫고 솟아 오른 간절한 기도에 힘입어 작가의 예술적 성취가 많은 관객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나의 관림일은 2023.2.2.(목)
작가와 이렇게 만나다
덕테이프에 포박된 바나나를 바라보다
작가 카텔란도 전시실 바닥을 뚫고 나와
그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생각과 생각이 교차되고
그 시점에서 작가와 내가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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