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은 형태와 색상을 드러내게 한다.
미술은 형태와 색상에 관한 예술이다. 테이트 미술관에서 특별전을 기획했다. 표제가 '빛'이다. 미술의 역사에는 빛이란 무엇인가라는 물리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이야기들이 있다. 이번 전시에서 테이트 미술관이 자신의 소장품을 중심으로 이것에 대답한다.
장소 :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관람료 15,000원
※ 매주 수요일에는 전시장 내 촬영이 가능. 카메라 플래시, 삼각대, 라이브 방송 등 관람에 방해가 되는 촬영은 불가
백남준의 '촛불 TV'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테이트 모던 멤버십라운지에서 밀레니엄 브릿지와 세인트폴 성당을 바라보던 기억을 더듬으며 전시의 첫 매듭을 당겨본다. 당초 우리나라 전시를 염두에 두고 기획된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나라 전시가 결정되면서 백남준의 작품이 전시장 입구에 기획된 것으로 보인다.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소장한 백남준의 '촛불 TV"이 도입부에 놓임으로써 우리나라 전시의 의미를 더해준다. 테이트미술관 입장에서도 백남준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으며 2019년에는 테이트모던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개최한 바 있어 도입부 백남준 설정이 나빠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촛불 TV'는 구형 TV 케이스에 초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다. 백남준은 “광원은 정보와 같다”고 하였다. 정보는 이야기다. TV 케이스라는 무대에 촛불이 이야기를 시작하여 드라마가 되고 다큐가 된다. 이제 막을 젖히고 안으로 들어서면 빛의 이야기가 시작될 것이다.
빛, 신의 창조물…
빛은 검은 알에서 태어난다. 아니쉬 카푸어의 '이쉬의 빛'. 간명하게 해부된 검은 알 속에 조명하나가 들어와 박혀있다. 작가의 시방서에 따른 작가의 의도일까? 전시기획자의 센스일까? 하여튼 빛은 검은 알에서 태어난다. 내부가 자연스럽게 만들어 내는 오목거울에는 우리가 거꾸로 가서 매어 달려 있다. 하여튼 빛은 탄생한다. 그리고 태초에 빛이 있고 말씀이 있었던 것처럼 전시는 시작된다.
종교적 그림에서 빛을 묘사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빛이 신의 창조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빛이 신의 신성함을 드러내 보이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태양 속에 선 천사'를 위해서는 빛의 의미를 연구해야 한다. 빛은 어둠에 대한 상대적 의미 외에 또 다른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빛, 연구의 대상…반사와 굴절 그리고 투과
윌리엄 터너의 빛에 대한 연구와 노력들이 보인다. 강의를 위한 도안들에서 관찰과 경험을 통해 빛을 이해하려했던 성실함을 엿볼 수 있다. 빛이란 단순히 어둠과 밝음의 문제가 아니다. 반사와 굴절 그리고 투과 등의 빛이 성질이 어떤 현상으로 나타나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특히 구름낀 바다의 풍경에서는 더 이상 밝고 어둠의 문제 만으로는 세상을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이다. 내셔널갤러리에 소장 전시되고 있는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가 떠오른다. 그에는 못 미치지만 '그림자와 어둠'과 '대홍수의 저녁'을 볼 수 있다. '대홍수의 저녁'에서는 우리는 바다 위에 떠있는 희미한 노아의 방주와 홍수난 육지에서 떠내려가는 동물과 사람들을 희미하게 엿볼 수 있다.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는 어둠이 아니다.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희미하게 사물을 비추고 있는 것이다. 하여 형체와 색상은 분명하지 못하다. 우리가 아는 세계도 그와 같다. 희미한 불빛에 비추어 보는 세상은 명료하지 못하다. 그것이 세상이기에
어둠 속에 두 개의 수정구가 나름의 원 운동을 그리고 있다. 하나의 광원에서 빛이 두개의 크고 작은 백색과 황색의 구를 비추며 그 궤적을 밝혀준다. '액체반사'라는 표제에서 말하는 것처럼 구에는 액체가 들어있다. 광원이 부딪혀 굴절과 반사가 만들어내는 물리학적 현상도 현상이지만 두개의 구의 운동이 만드는 궤적도 수학적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오직 어둠과 빛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아름다움이 방안 가득하다.
릴리안 린, 빛의 물리학을 구현하다…입자와 파동을 동시에 그려내다.
빛의 인상…빛에서 받은 느낌을 표현하다
방에 들어서면 중앙에 쿠사마 야요이의 '지나가는 겨울'이라는 조형물이 벽을 둘러싼 그림들을 반사시키고 있다. 빛의 인상은 밝다는 것이다. 흐린 날씨에도 불투명한 구름에도 빛은 밝은 이미지를 우리에게 준다. 이 전시실의 느낌도 마치 그렇다. 자연의 모습에서 빛의 인상을 찾아나선 19세기 후반 작가들의 생각이 묻어 나온다. 존브랫의 '도싯셔 절벽에서 바라본 영국해협'은 구름 뚫고 내려오는 신의 은총과도 같은 빛의 모습을 시원하게 묘사하고 있다.쿠사마 야요이의 조형물에 비친 모습에서 우리 또 다른 빛의 오묘한 의미를 깨닫게 된다.
모네의 '엡트강가의 포플러'는 그림 실물을 보아야 그가 그린 빛의 인상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마찬가지지만 이 작품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흐린 날씨일까. 물안개일까. 흐릿한 자연의 인상을 예민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빛은 구름이나 안개를 만날때 더욱 극적인 인상을 부여한다.
이 작품은보험평가액만 500억원으로 이번 전시작 중 최고가였다고 한다.
카미유 피사로 ‘르아브르의 방파제 오전 흐리고 안개 낀 날씨"라는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흐리고 안개낀 것이 빛의 의미를 오히려 새롭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과 어둠이라는 2분법적인 구도를 벗어나야 미묘한 빛의 느낌을 확장해 나갈 수 있다. 알프레드 시슬레 ‘작은 초원의 봄’ 등 인상파 작가들의 풍경화도 상쾌한 빛의 인상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장엄한 빛…자연은 장엄한가
어두운 분위기 속에 조셉라이트와 존 마틴의 그림들이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한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빛이 필수적인 것이다. 극적인 사건을 조명하는 것도 결국은 빛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밝힌다라는 표현을 쓴다. 밝히기 위해서는 빛이 필요하다. 형체와 색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곧 밝힌다의 뜻이 아닐까?
진실된 빛…잔잔한 그리고 목가적 아름다움의 빛
존 컨스터블은 자연과 하늘의 변화에 따른 효과에 대해 탐구했다고 한다. 연작 판화들이 줄을 지어 진열되어 있었지만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는 올라퍼 엘리아슨의 작품이 우리를 압도해 온다.
브루스 나우먼, 빛을 가두다.…행위예술로 빛을 이용하다.
작품의 설명은 길지만 내가 받은 느낌은 특이한 행위로써 의미를 창출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과연 어떤 의미를 갖고 공감을 줄 수 있을까? 행위예술의 한계를 본다. 그리고 빛을 가두려는 편집증적인 생각을 본다. 그리고 사람들은 보았는지 모르겠다. 바닥이 빛으로 인해 일어난 그림자선이 보이는 듯 하지만 그것도 연출된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작가의 시방서에 있는지 없는지 나는 모른다. 오히려 기이한 듯 바라보는 일렬로 도열한 관람객과 어울려 모습이 재미있었다. 또한 빛을 가두기에는 더 커다란 공간 연출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빛과 우주.…올라퍼 엘리아슨이 만들어내는 빛의 세상
이제까지의 전시가 작가들이 빛에 대해서 배우고자 했다면 이번 전시실은 과학이 알게 된 빛의 특성을 이용해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해 내는 것이다. '우주의 먼지입자'는 커다란 구형의 모빌에 조사등이 비추어지며 예술이 시작된다. 철사로 만든 것 같은 모빌이 투사되어 조형물과 그림자가 어우러진다. 그림자는 보통 빛이 통과되지 못하여 만들어지지만 이 그림자는 빛이 통과되어 그림자를 만든다. 부분적으로 반사되는 필터유리는 묘한 반사를 통해 벽면에 빛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각도와 위치에 따라 진하게 옅게 반사된 빛이 벽면에 다양한 궤적을 그리며 퍼져 나간다. 먼지가 우주이고 먼지가 곧 우주이기나 한 것처럼. 엘리아슨이 만드는 우주는 언제나 경이롭다.
또 하나의 작품은 원형판을 조사등이 비추고 있는데 묘한 변화가 일어난다. 불빛이 원형판을 통과해 벽면에 노란 원형의 그림자를 생성한다. 원형판의 회전에 따라 그림자의 크기는 가늘어졌다 굵어지기를 반복한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원형판은 노란색만 통과시키는 원형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스터리는 그 주변을 따라 돌아가는 푸른색 원형 그림자다. 이것은 어디서 오는 것인지 광원을 찾아 보아도 발견할 수도 없다. 여기에 트릭이 있는데 가운데 돌아가는 원형판은 파란빛은 반사시키는 특성을 갖는 판넬이었던 것이다. 이제 빛을 이용해 마술사처럼 작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데이비드 바첼러, 런던 거리를 비추다.…색채를 찾아 거리로 나선 것인가
이층으로 올라가면 데이비드 바첼러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아크릴 색판이 짐수레에 붙어 전시되어 있다. 전시장 입구에도 색으로 쌓아 올린 탑이 이 작가의 작품이다.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지만 나는 알 수가 없다. 전시장이 끝나는 자리에도 이 작가의 원형의 색조각이 놓여 있다. 유리창에 비쳐진 원형의 오색 과녁이 빙글거리며 돌아간다.
실내의 빛.…빛을 실내에 그려새기다
어디선가 빛이 흘러 들어 오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빛은 비춰지지 않고 있었다. 바닥에는 선명한 창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데 말이다. 단 4개의 작품만 전시되는 ‘실내의 빛’. 벽엔 세 점의 그림만 걸려 있다. 나머지 하나는 전시장 바닥에 깔려 있는 카펫 그 자체다.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저녁 6시’란 설치작품이다. 언뜻 보면 카펫 바닥에 창문 그림자가 비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전시실에는 창문이 없다.
빌헬름 함메르쇼이의 ‘실내'와 '바닥의 햇빛’이 카페트 위의 창문 그림자와 어우러져 명상적인 분위기를 이끌어낸다. 실내에서 여인의 뒷 모습이 주변의 빛에 의해 두드러진다. 하지만 그녀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원형의 탁자 앞에서 요즈음이라면 핸드폰을 보고 있다고 할텐데 말이다. 실내의 비밀스러움이 빛나고 있다고 할까? 윌리엄 로덴슈타인의 ‘엄마와 아기’는 실내에서의 빛이 주는 따사롭고 평화로운 느낌을 전해준다.
빛의 흔적.…빛을 실내에 그려새기다
라슬로모호이너지의 빛의 흔적을 찾아가는 이야기들이 방안을 메우고 있다. 그는 밫을 다루는 사람이다. 기요르기 케피쉬와 루이지 베로네지 등의 사진들이 함게 전시되었다. 라슬로모호이너지는 음영을 사용하지 말고 선만으로 표현하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빛이 어떻게 반사되고 굴절되며 형상을 만드는지 그들은 바라보고 관찰하고 있자.
빛의 색채.… 칸딘스키의 '스윙'이 모빌과 어울려 색채에 운동감을 더한다.
오색의 모빌에서는 가는 바람 소리가 난다. 바람에 살며시 작은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제 색체는 그 자체로 움직이려 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모빌의 바다가 너무도 적다. 맞은 편에 칸딘스키의 '스윙'과 페이화이트의 '매달려 있는 조각'이 힘을 더해준다. 색체의 변화로도 움직임은 느껴진다. 더우기 선이나 형체의 운동성이 더해지면 더욱 그러하다. 이제 색채 자체도 자기 주장을 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다.
칸딘스키는 자신의 작품이 단순한 재현을 넘어 음악을 들을 때처럼 보는 이가 참여하는 경험을 부여하고자 했다고 한다. 참여는 이제 현대미술에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 되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전시에서 전시기획자나 큐레이터의 고전적 통제를 너무도 많이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 아쉽다.
리즈 로즈, 빛과 소리로 음악을 만들다…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빛의 공간
레이저빔에서 쏟아지는 단순한 형광의 빛이 신호처럼 쏟아져 흐른다. 관람객의 그림자가 어울려 여기서는 너무도 간단없이 칸딘스키의 바람이 이루어진다. 아날로그 신호음이 영상을 만들어낸다. 재미있는 설치물이다. 입장하며 나누어진 안내 책자의 설치된 모습을 보니 설치공간이 좁은 것이 아쉽다는 생각도 든다.
스티븐 윌라츠, 빛을 움직이다.…쉽지 않은 개념예술의 세계
1980년대 부상한 개념예술이라 한다. 완성된 예술품보다 예술품의 기반하고 있는 개념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고 한다. 이해하기 어렵다. 쉽게 설명하면 음악이 소리를 재료로 하는 것처럼 개념을 재료로 미술을 한다는 것이다. 개념은 생각이고 언어와 가까우니 텍스트를 소재로 하는 제니홀저도 개념미술가라 할 수 있다. 스티븐 월라츠의 '자동시각장 제1번'은 제목부터 교향악과 같은 개념을 사용한다. 이 작품을 어둠 속에서 보며 짧은 순간에 무엇을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텍스트도 없이 개념을 형상으로 전달하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제임스 터렐, 빛으로 숭고함을 경험하다.…경험이란 자신과 만나는 것
명상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형광등이 빛을 내는 푸른 빛의 세계가 순수하게 열린다. 우리는 생각하고 체험하며 숨쉰다. 제임스 터넬이 창조한 공간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경험한다. 숭고하다는 것은 이리도 단순한 것이다. 꾸밈이 없고 섞이지 않는다. 스스로 그 자체로 족하다. 그래서 숭고하다고 한다. 작가의 이러한 구상은 어디서 온 것일까. 뮤지엄 산에서 경험한 하늘이 열려있는 '스카이페이스'에서 열린 하늘과 만나보는 경험에 더하여 오늘은 푸른 빛 속의 내면과 만난다.
빛 인간의 창조물…설치 예술에서 빛은 이제
빈 플래빈의 형광등으로 만든 조형물은 일상 속에서 단순하고 명료한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피터 세즐리에 작품도 색상의 띠를 그리며 걸려 있다. 빛은 설치 미술에 중요한 요소가 되어 있다. 그리고 생활 속에도 이제 너무도 흔히 쓰인다.
백남준의 촛불에서 시작한 빛의 여정은
아니쉬 카푸어 '이쉬의 빛'에서 알에서 깨어나 터너의 연구를 거쳐 빛의 물리학을 구현하고 모네는 빛의 인상을 이야기한다. 빛은 장엄하고 진실하다. 누구는 빛을 가두고 올라퍼 엘리아슨은 빛으로 우주를 그리고 마법을 빚는다. 런던 거리에서 빛을 찾아나서고 실내에 빛을 새겨낸다. 빛의 흔적을 탐구하고 색체가 움직이고 참여하기를 원한다. 빛과 소리로 음악을 연주하여 빛의 공간을 만들고 누구는 빛을 개념예술로 가져간다. 명상적인 푸른 빛과 마주 서 자신과도 만나고 이제 현실과 일상에서의 빛과도 만나다. 아트샵을 둘러보고 바실리 칸딘스키의 '스윙' 포스터를 구입해 거실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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